‘앎’의 두 가지 방식
‘앎’의 두 가지 방식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9.09.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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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창호 하브루타 독서법 및 디베이팅 독서토론 교육가

‘앎’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는 동안 배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학생이었을 때, 대학에 가기만 하면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곧 맛보게 될 자유를 학수고대하면서 자신을 불태웠던 시기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학교 수업과 공부를 통해서 알았던 지식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휘발성 지식으로 전락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앎’에는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동적인 앎’으로 본인의 필요에 따라서, 혹은 환경의 요구에 따라서 새롭고, 필요한 것을 인식하여 자신의 의식 안에 넣어 두는 행위라고 정의 짓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앎의 장점은 노력에 따라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축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앎은 특히 말보다는 짧은 문구나, 문장으로 표현되고, 객관식 문제를 풀 때, 자신이 습득한 실력을 드러내는 지식입니다.

우리 사회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수동적 앎을 성공의 사다리로 믿고 있습니다. 물론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처럼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동적 지식은 앎의 속도는 빠른지만, 깊지 않고, 그 앎이라는 과정 속에는 그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고, 깊이 사고하고, 의심하며, 깨우치는 단계가 없습니다. 즉 지식의 한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수동적인 앎에는 ‘유레카(깨달았다)’라는 자기 스스로 맛보는 ‘지적 희열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깊은 성찰과 깨달음을 통해서 알아낸 것을 단순한 이해와 암기를 통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머릿속에 넣어 둔다면, 그 지식의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앎이 지속하지 않고, 특히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행동의 변화로 결실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수동적인 앎’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식인들이 도덕적이고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부패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지탄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앎은 ‘긍정의 앎’으로, 제가 제시하고 싶은 진정한 앎의 형태입니다.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익숙함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갖고, 또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앎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것이 바로 ‘긍정의 앎’인 것입니다. 이 앎 속에는 자신과 즐거운 만남이라는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남들이 전혀 관심 없고, 당연시 여겼던 사과의 낙하에 의구심을 가졌던 뉴턴, 닭이 알을 품는 모습을 보고 직접 해본 에디슨이나,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새로운 깨달음에 ‘유레카’라고 외치며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로 뛰어나간 아르키메데스, 그들 모두 이러한 긍정의 앎을 통해서 자신과 마주하고 앎 속에 자신의 감정을 덧대어 지적 희열감으로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긍정의 앎을 행할 수 있을까요? 바로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긍정의 앎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취하는 독서, 저자의 문장이나, 주장에 감동하여 동감하거나, 새로운 반론을 제기하는 독서, 깨닫게 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독서, 이러한 독서를 통해서 ‘긍정의 앎’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독서 후, 읽은 책에 대해 발문과 꿰뚫는 질문으로 정리할 때, 긍정의 앎은 최고치에 이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국민이 도서를 가까이할 때, 국민은 지역과 혈연, 특정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함몰하지 않으며, 어느 방향이든 스스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패권화한 세계 속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 도서 읽기 운동을 시작하여 자신과 국가를 변화시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