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흐름 따라 차곡차곡 쌓아온 사유의 흔적을 시에 담다
인생의 흐름 따라 차곡차곡 쌓아온 사유의 흔적을 시에 담다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9.08.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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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직장인에서 시인으로 거듭난 김다연 시인
 
반평생을 넘게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나이, 53세에 첫 시집을 냈다. 시가 쓰고 싶어 시를 쓰기 시작하고 <조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후 22년 만이다.

문학평론가의 호평에 마음 한구석엔 뿌듯함이 솔솔 새어 나오지만, 그래도 자랑하기는 여전히 수줍다. 그래서 출판기념회도 안 했다.

국민건강보험 천안지사에서 일하는 김다연 팀장의 어릴 적 소망의 모습인 시집 ‘저 혼자 머무는 풍경’은 그렇게 부끄러운 듯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기나긴 동면의 밤을 열고 존재의 가치를 알린 김다연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늦게 배운 시작(詩作), 삶의 활기가 가득 
 
20~30여 년 전만 해도 여성이라면 결혼과 출산, 육아에 온 힘을 다해야 했고 아이 키우는 일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다. 게다가 직장까지 다니고 있던 김다연 시인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시 쓰기’를 선택했다. 여자로서의 삶, 육아 불평등 등을 분노의 회오리로 몰아치지 않고 감정을 눅인 시어로 치환해 써가며 삶의 생기를 얻었다.

“시 쓰는 시간은 나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지요.”

아이를 한창 키울 때였다. 주말에 아이가 놀아달라고 보채는 상황을 시로 썼는데 직원들의 반응이 꽤 좋았다. 시를 써보라는 권유를 받기까지 하자 용기가 났다.

길이 열렸다. 때마침 천안문화원(구)에서 ‘시창작교실’이 생겼다. 안수환 시인 등 내로라하는 글 전문가들이 가르치는 강좌였다. 2년 정도 꾸준히 습작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월급을 탈 때마다 시집 2~3권씩 사서 읽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늦게 시작했지만, 시를 배우러 다닐 때 얼마나 즐겁던지, 삶의 활력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마음 동하는 날이면 자신에게 찾아온 감성의 사유를 끄적이며 시 한 편씩 완성하곤 했으나 감히 시집 출판까지 엄두를 내진 못했는데. 실행은 불현듯 이루어졌고 오랜 시간 묵혀두며 반질반질 윤을 냈던 시어들은 이제 촉촉하고 따사롭게 그의 삶을 적시고 있다.
 

 

“내게 힘을 준 고3 담임 김지철 교육감님” 
 
시대가 그렇듯 그도 팍팍하고 힘든 시절을 겪으며 어른이 됐다. 어렴풋한 문학소녀의 꿈은 그에게 사치스러운 미래로 치부됐다.

공부를 잘했음에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 담임교사였던 김지철 현 교육감은 “진작 말하지 그랬냐”며 아버지에게 전화까지 걸어 대학에 진학하도록 설득해주었으나 학력고사를 보고서도 대학에 가지 못할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김지철 선생님은 매우 아쉬워하시며 공무원 시험을 권해주셨지요.”

그렇게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책이 좋았던 그는 천안역 근처 동방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당시 시절이 어수선해 천안역 앞은 수시로 시위가 열렸는데 어느 날 서점 안으로 웬 남자가 몸을 피해 뛰어 들어왔다.

“김지철 선생님이셨어요. 선생님을 저를 보자 매우 놀라시며 눈물을 글썽이셨죠. 저도 눈물이 핑 돌았어요. 또다시 ‘공무원 시험을 공부해보라’라며 권해주셨지요.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김 시인은 자신을 걱정해준 담임의 말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건강보험공단에 합격해 지금도 그곳에서 건재하게 일하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은사였기에 교육감에 출마할 때 제자 대표로 출마 지지문을 편지로 써서 감사의 마음을 보내기도 했다.
 
 
<버찌가 익을 무렵>
 
고요할수록
깊어지는 것이 있다
 
오월의 햇살 아래
깊어짐으로 오히려 아련한
기억을 불러내는 것들
 
잊혀졌다고 여긴 것은 잠시다
 
햇살 촘촘히 새긴 잎 사이로
가장 낮고 무거운 빛을 쏟아내는 것들
 
해묵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맨발 훌훌 털고 아낙의 눈 속을
파고든다
 
봄빛은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그러나 가볍지 않게 
 
김다연 시집 ‘저 혼자 머무는 풍경’에서는 격렬한 어휘를 찾을 수 없다. 깊고 고요하고 차분하다. ‘버찌가 익을 무렵’의 시처럼. 그러면서도 은근히 요동치는 격정은 엿보인다. 그의 시는 물끄러미 관조하는 풍경 속에 담긴 세상의 모든 모습이 조용히 제 자취를 들춰 보이게 한다. 삶의 고단한 단면과 생명과 죽음의 풍경도 평정의 언어로 다독이며 제 모습을 끌어내 온다.

윤성희 문학평론가는 시집 말미 해설에서 김다연의 시를 ‘깊고 고요한 평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풀며 마치 시 속에 펼쳐진 풍경화를 읽는 듯한 감흥을 주는 시집임을 알게 했다.

윤 평론가는 “시도 배움을 통해 훨씬 나아진다. 김다연 시인은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배움을 넓혀나가고 앞으로도 작품성 있는 시를 세상에 내놓을 잠재력이 있는 시인으로 보인다”며 독려했다.

시절에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꿈을 조용히 토닥여온 김다연 시인. 여자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모든 역할을 감내하며 당도한 꿈이기에 그는 더없이 자신의 첫 시집이 소중하다.

그러면서 자신처럼 시집 내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누구나 시를 써놓고도 부끄러워서 못 내놓죠. 나도 아직 작가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근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써나가면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요. 시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을 경험해보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
 
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