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대한민국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유관순은 용감했다. 어린 유관순은 만세를 부르다 잡혀갔으나 끝까지 나라를 위한 옥중 항거를 멈추지 않다가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우러를 수밖에 없는 항일 투사다.
사실에 근거한 역사 재평가 필요해
그러면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3.1운동이 느닷없이 일어났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이용길 회장은 “목천 일대를 물들인 동학사상과 세성산 전투의 역사적 경험이 아우내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학혁명 없이 3.1만세운동도 없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둘째는 유관순 혼자 조직하고 지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동학혁명 패퇴 후 10여 년이 지나면서 병천 아우내 지역에서 근대식 학교 교육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청신의숙 장명학교 진명학교가 그곳이다. 성공회가 세운 진명학교는 많게는 150명가량의 학생이 있었다. 김구응 열사는 이 학교들을 두루 거치며 교사로 일했다.
이 회장은 “동부 6개면 아이들은 거의 다 거기서 근대식 교육 받았다”며 “자연스럽게 3.1혁명을 일으키는 전초적인 의식화 교육이 이뤄졌다고 본다. 이는 김구응이 실질적인 독립운동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며 지내왔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이 회장은 “입장면 양대리와 병천면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규모와 격렬함이 비슷했는데 아우내는 진명학교 학생들과 농민들이 중심이 됐고 금광지역이었던 입장면 양대리는 학생과 노동자 중심 만세운동이 이뤄졌다”며 “이들이 3.1혁명 주요세력이었다”고 말했다.
기록에도 명백한 김구응 열사의 행적
또 성공회 전해주 신부는 조병옥 김활란 모윤숙 등 이화학당 계열이 3.1혁명을 의도대로 각색한 것으로 보는 근거들을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왜 4.1문화제인가
아우내만세운동은 당시 음력 3월 1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1일이다. 그래서 아우내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4.1문화제’라고 지칭했고 시민 참여를 고려해 전날인 3월 31일 일요일에 개최하는 것이다.
이날 연구회는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의 숨은 주역인 ‘아우내 4.1혁명의 길 걷기’ 행사를 진행한다. 또 전해주 신부와 살아있는 증인, 김구응 열사 손자인 김운식 선생의 강연을 마련했다.
한일 평화콘서트도 열린다. 김종수 아우내재단 이사장은 “한일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올바른 역사의 시점을 같이하는 일본 시민들이 여기와야 한다”며 “재일 인권운동가들과 한국에 호의적인 일본인들을 초청해 공연과 이야기 무대를 연다”고 말했다.
일본에 강제연행된 강금순 노동자 2세인 배동록, 싱어송라이터이자 성공회 교수인 이지상, 신중현이 좋아 한국에 와서 홍대 앞에서 공연하는 밴드 곱창전골 리더 사토 유키에 등 한일 평화를 염원하는 다양한 뮤지션과 이야기 손님을 초청했다.
시간 |
행사명 |
장소 |
내용 |
오후 2시 |
‘아우내4.1혁명의 길’ 걷기 |
병천면 일대 |
아우내3.1공원 -> 김구응·최정철 열사 유택 -> 47열사 사당 -> 유관순 열사 사당 -> 3.1혁명기념비 -> 성공회 병천교회 |
오후 4시 |
기념강연회 및 초청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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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구 문화원 2층 강당 |
전해주 신부와 김운식 선생(김구응 열사 손자)이 진명학교와 김구응 열사를 말한다. 호서대 이기영 교수와 천안제일고 심우근 교사 기념공연 |
오후 6시 |
이야기가 있는 평화콘서트 |
병천면 아리아리카페 앞 |
아우내재단 주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