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 근현대사 복원, 역사 재정립 작업과 같아“
”한 집안 근현대사 복원, 역사 재정립 작업과 같아“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9.03.2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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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 그러나 현재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집 2부-②
 
천안아산신문이 진행하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집 기획 2부, 이번 68호는 동학농민혁명운동부터 대 이은 독립운동의 후예, 박기평 동학농민혁명천안유족회장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싣는다.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잡고자 대를 이어 몸과 마음을 다한 결말은 후손에게 물려준 가난과 뼈저린 집안의 역사였다.

박 회장의 고·증조부가 활동했던 시대상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가 왜 쉽게 풀어지지 않는지 함께 고민하고 그 해결방안을 생각해본다. <편집자 주>

 
 
“고조부가 1894년 10월 21일 세성산 전투에 참여하셨어요. 그러나 그해 11월 9일 관군에게 붙잡혀 효수당하셨지요. 당시 동학교주 최제우의 신원회복운동에도 참여하셨고 40명이 올린 복합상소의 대표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동학운동에 깊이 관여하셨어요. 증조부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일제 강점기 진천군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진천 향토사에 기록이 남아있어요. 조부는 아우내만세운동을 했던 47 열사 중 한 분으로 순국자 추모각 안에 이름이 있고요. 또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당한 후유증으로 제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3대가 넘는 집안이 우리나라 근현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며 참혹한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후손, 박기평 회장은 이렇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개 면에 이르는 방대한 땅 모두 잃어 
 
박기평 회장의 조상은 충북 청원군(구) 일대에 살던 춘천 박씨 일가인데 일제강점기에 토벌을 당해 고조모의 고향인 지금의 천안 동면 일대에 터를 옮겨 살기 시작했다. 당시 동면 병천면 목천읍 진천군은 지금처럼 행정구역이 나뉘기 전 모두 같은 생활 구역으로 주민들이 살아온 곳이다.

박 회장이 수집한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한 지역의 면 정도 넓이에 해당하는 방대한 땅이 모두 박 회장 집안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 회장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동학혁명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조부들의 행적은 모두 신분을 속여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나 숨어지내야 했는데 땅이 많아서 이름을 바꿔갔던 것.

땅이 많아 박 회장의 조부들은 마음 놓고 자금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어다니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땅을 다른 이름이나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해두었더니 세월이 지나 모두 흩어져버렸다.

박기평 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먼 친척으로부터 ‘오창과학단지 일대가 집안의 땅’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후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하며 알게 됐다.


한 번 뒤틀린 역사, 다시 꿰지 않으면 계속 뒤틀려 

 
“주변에서 ‘집안 어른들이 동학농민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운동하다 망했다’는 소리를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정말 집안 어른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까 엄청난 이야기가 숨어있었어요. 그렇게 자료를 찾아다닌 지 벌써 12년이 흘렀네요. 단군 영정을 벽에 붙이고 사셨던 조부, 지금 기억해보면 의미 있는 행적이셨는데 어릴 땐 몰랐던 것이…. ”
 

박기평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동학과 독립운동에 몸 바친 조부들로 집안이 영예롭기는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빴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아버지까지 일찍 작고해 어머니는 일주일이나 굶어가며, 그야말로 자식들 먹여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자랑스러운 행적은 오히려 박씨 후손을 가난과 서러움의 가운데에 앉혀놓았다. 세월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 그 시대에서 100년이 지났음을 기념하는 2019년,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매우 많아요. 지금 갖게 된 자료도 찾아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근현대사를 바로 알려줄 기록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박기평 회장이 수집한 자료들

박 회장은 “일일이 지적대장을 다 조사해 찾고 지역 향토사를 구석구석 뒤졌다”며 서류철을 한 묵직한 서류뭉치들을 보여주었다. 조부들의 행적을 찾으면 형광펜으로 표시해가며 집안의 역사를 꿰맞춰 나갔다. 심적인 확신은 있지만 아직도 증명해야 할 과정들이 많기에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우리 역사를 바로잡을 이는 바로 우리, 다른 민족이 대신할 수 없어 
 
조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박기평 회장은 최근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지인의 소개로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송길룡 연구실장을 알게 됐고 자료 조사에 더 힘을 받는 중이다.

송길룡 실장은 “1894년부터 1919년까지 박기평 회장 집안 어른들이 대 이어 참여했던 의로운 행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씨 집안에 큰 피해를 주게 됐다. 박기평 회장 집안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비단, 박씨 집안의 역사회복만이 아니다. 천안 병천면 진천군 옥산면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발굴 복원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충청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작업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송 실장은 “학술적으로 대다수 망실한 증거 속에서 문서 자료 입증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순 없다. 동학과 3.1운동 관련 인물 연구는 실증적 차원과 또 그것을 넘어서 입체적인 접근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마을 주민들의 구술 증언을 폭넓게 시도해야 하고 토지 관계 서류에 나온 이름이 정확히 누구인지 확인하는 작업, 조사작업 비용을 모두 개인이 부담했다. 이런 것들이 지역사회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길룡 실장은 “근현대사 복원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숨겨진 지역사회의 한 시대를 복원하는 것은 방치되거나 외면당한 역사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한 집안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돼요. 한 집안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한 지역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