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
“아직도 식구들 밥 걱정하니?” “요즘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알아서 해먹을 때 됐어,” “애들도 다 컸고.”
제주에 도착하니 오전 9시 무렵. 공항 근처에서 차를 빌려 첫날은 그야말로 갈지자 여행을 다녔다. 지리를 모른 채 무턱대고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달렸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쭉 내려가 안덕면 대평리에서 바닷바람과 인사했다.
주변 화덕피자 맛집에 들러 제주의 피자 맛에 흡족해하며 강정포구에 들렀다. 강정해군기지 앞에는 여전히 제주해군기지를 둘러싼 반대 시민들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주민들의 숙원은 바람결에 날려간 걸까. 최근 공군기지까지 들어선다는 소식에 잠시 답답한 가슴을 토닥였다.
동백꽃이 보고 싶다는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러 남원읍 제주동백수목원에 갔다. 어쩌나. 동백은 색바랜 꽃잎만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한숨 쉬는 친구를 위로한 말. “다음에 또 오자!” 언제 올지 몰라도 다음을 기약하는 여행은 즐겁다.
다시 안덕면으로 가서 보말미역국과 고등어구이를 먹었다. 특히 보말미역국은 육지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근처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비가 뿌리기 시작해 돌아갈까 하다가 “무지한 여정은 쭉 가는 거”라고 깔깔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딱 걷기 좋았다. 1시간 남짓이면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고 멀리 보이는 산방산과 형제섬도 걷는 길의 풍광을 더해주었다.
언젠가 왔던 제주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 친구가 남원읍 양갈비 맛집을 소개했다. 남원읍과 안덕면을 왔다 갔다 하는 동선을 알고서도 “우리 정말 웃긴다”며 연신 웃음꽃이 터지는 여인 셋.
여고 시절로 돌아간 세 여인은, 실수해도 공연히 먼 거리를 돌아도 내내 즐거움과 만났다.
양갈비를 맛있게 먹고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치킨집에서 치킨을 사 들고 숙소에 도착했더니 밤 10시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의 맛을 봐야 한다며 제주산 소주 2종류를 준비했다. 술을 잘 못 하는 세 여인은 한 모금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제주의 첫날밤을 수다로 장식했다.
가는 곳마다 만족이 꽉 찬 여행
본태박물관은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갔지만 대만족이었다. 세 시간 넘게 있었는데 지루한 줄 몰랐다.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지은 박물관은 그 자체만으로 예술적인 건물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의 우리 장례풍습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변질시켜놓은 것이다. 그는 “우리 전통 꽃상여는 종이꽃을 다는 게 아니라 고인의 일상을 표현한 꼭두각시를 상여에 부착해서 애도를 표현했다. 수의를 별도로 입히지 않고 고인이 평소에 즐겨 입던 옷을 수의로 입혔으며 부모를 보낸 상주들이 삼베 옷을 입었다”고 말했다. 또 빈소 앞에 국화를 놓는 관습은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관람객들에게서 ‘잘못 뿌리 내린 문화가 이렇게 우리 정신을 멍들게 했구나’ 하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제3관에서는 일본의 유명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방-영혼의 반짝임’과 ‘Pumpkin’ 작품이 전시돼있었고 관람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또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현대미술품을 전시한 제2관은 내부가 온돌 바닥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제1관은 한국전통수공예품의 다양함과 고급스러움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어 간 화순곶자왈은 제주 태초의 원시림을 간직한 곳이었다. ‘제주의 허파’라고 불리는 곶자왈. 때가 겨울이어서 곶자왈의 속살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새덕이’라는 나무가 있는 곳은 마치 여름 숲처럼 우거졌다. 겨울 속의 여름을 보는 감회가 새로웠다. 전망대까지 오르자 또다시 봉긋 솟은 산방산을 만났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를 눈앞에서 보는 것도 이채로웠다.
해 질 무렵 모슬포항에서 대방어회를 맛봤다. 겨울이 제철인 대방어 맛에 세 여인은 ‘다이어트가 뭐니?’란 구호를 외치며 실컷 먹었다. 역시 여행의 화룡점정은 맛집 순례다.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아쉬웠다. 한 친구가 “벌써 가는 날이야.” 하면서 괜한 투정을 부려봤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길을 나서 아점으로 제주 토속음식을 맛봤다. 허름한 식당에서 먹는 성게알비빔밥과 갈치국이 맛났다.
제주 성산 AMIEX 전시관 ‘빛의 벙커’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으로 완성한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전’을 열고 있었다. 전시관 안에 들어서자 환상 그 자체였다. 클림트의 화려한 색감과 작품의 모티브들이 영상과 어우러져 벽과 바닥에서 자유로이 변화하며 새로운 예술 장르를 선보였다. 그림과 어울리는 음악 또한 가슴을 울렸다. 한 친구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다음 코스는 김영갑 갤러리. 충남 부여 출신인데 제주에 반해 제주에서 평생 살다가 하늘로 간 사진작가 김영갑이다. 그의 사진엔 제주의 민낯이 있고 제주에만 있는 바람의 흔적이 담겨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김영갑갤러리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다.
특히 박물관에선 해설사의 설명을 꼭 듣길. 새로운 지식과 사실을 흥미롭게 설명해준다. 아는 만큼 더 보이는 건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