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직산읍 민간인학살 200명 희생사건 대법원 승소한 유족 증언
천안 직산읍 민간인학살 200명 희생사건 대법원 승소한 유족 증언
  • 천안아산신문
  • 승인 2018.11.0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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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유족이 말 못 하고 있을 듯”

천안시 직산읍 군동리 성산 민간인학살 200명 희생사건의 직계유족이 나타났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희생자위령제 준비위원회(이하 위령제준위)가 지난달 23일(화) 천안시청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3일 만이다. 유족과 처음 접촉한 이용길 위령제준위 위원장은 “26일(금) 직산읍 군동리 경로당 일대를 탐문하던 중 황씨 형제가 몰살을 당했다고 증언하는 할아버지를 만났고, 다른 경로당에서 이용길 위원장 명함을 받아든 황씨 종손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일러주어 연락이 왔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27일(토) 기자는 이용길 위원장, 송영배 집행위원과 황씨 유족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성산 민간인학살 매장 추정지 현장 재확인에 나섰다.

무덤떼 현장 일부

학살당한 사형제 중 장남 황여용씨 직계종손 황병용(55)씨에 따르면, 할아버지 형제가 여럿 있었는데 황씨 형제(둘째 조부는 사촌) 4형제 중 셋째 조부가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다녔고 넷째 조부는 배제중학교를 다녔다. 두 조부 다 자식이 없었는데 셋째 조부만 보도연맹에 가입됐다는 것. 이 때문에 사형제가 한꺼번에 몰살당했는데 둘은 직산읍 삼은리 저수지 근처에서, 둘은 성산 일대에서 총살을 당했다. 황씨는 “당시 의용소방대원 이웃 어른 두 분 중 한 분이 자신이 그 구덩이를 팠고 총살당한 할아버지를 묻었다고 밝히고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또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서 조사를 시작했으며, 2010년 진화위의 진실규명결정서를 토대로 충남에 있는 유족 33인이 국가를 상대로 단체소송을 진행했고 2013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고 밝혔다. 황씨는 당숙 어른, 사촌 형제와 함께 소송을 진행했으며 당시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당숙 어른이 뇌졸중으로 말씀을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직산초등학교. 전면에 보이는 분홍과 파랑 건물이 당시 경찰지서 위치

또 다른 매장 추정지 발견

새로운 매장 추정지도 발견됐다. 황병용씨가 조부 형제가 묻혔다고 추정하는 곳은 천안시가 성산에 ‘야생동·식물 보호구역’ 표지판을 세운 곳에서 약 10여 미터 서쪽으로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이 진화위가 사진을 찍은 장소라는 것. 북쪽으로 계단식 형태의 편평한 지면이었으며 근거리에 폐석재 공장이 보였다. 무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무덤떼 추정지와는 약 500미터 떨어진 곳이다.
무덤떼 현장까지 마저 살펴본 황병용씨는 “몇 명씩 성산으로 끌고 가서 죽이고 묻고 또 죽이고 묻고 했다고 들었다. 무덤떼 현장 이곳에 족히 200명은 묻혔을 것 같다”며 “한두 곳에 묻힌 게 아니다. 이곳 말고도 덕고개라고 불리는 곳과 가까운 삼은리 저수지 근처에도 희생자들이 묻혀있다. 조부의 형제들이 그곳에서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직산현관아 뒷산이지만 이웃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이 더 많았다. 특히 마정리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좌로부터 황병용 유족, 이용길 위원장, 송영배 집행위원

이용길 위원장은 “매장 추정지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 진화위가 이곳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간 사실이 있음에도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바로잡을 묻혀있는 진실이 아직 많다는 증거”라며 “특히 진화위 기록 참고인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이 성환을 점령할 당시 마정리는 ‘제2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다. 한국전쟁기에 직산읍 일대는 참혹한 민간인학살의 광풍이 휩쓸고 간 지역임이 분명하다. 하루빨리 발굴조사단을 꾸려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황병용씨가 덧붙였다. “나는 재판까지 진행해 승소했지만, 아직도 많은 유족이 말을 못 하고 있거나 어찌할 줄 몰라서 그대로 있을 거예요. 이번 매장 추정지 발견을 계기로 천안시의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져서 유족들이 가족의 유해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노준희 기자 dooaium@hanmail.net